그렇게 비유를 한 이유는 옛날엔 그런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엔 사람들이 신발을 안 신었어요. 알겠어요? 부유한 이들만 신발을 신었어요. 영적 수행을 하는 이들은 대개 맨발로 걸어 다니며 고행했어요. 영적 수행자들에게는 원칙이 있었는데 출가하면 맨발로 걷는 거였죠. 그게 더 간단했죠. 어디를 갈 때마다 신발을 사야 한다면 신발 살 돈은 어디서 마련하겠어요? 당시 신발은 대개 가죽으로 만들었어요. 수행자들 대부분은 가죽 신발을 원치 않았기에 맨발로 다녔어요. 맨발로 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문간에… 옛날에 대부분 맨발로 다닌 이유는 신발 살 여력이 없어서예요. 다른 집에 가면 문밖에 발을 씻는 데 쓰는 대야가 있거나 적어도 물을 담아둔 통이 있었어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거기에 발을 담그죠. 그냥 잠깐만 담가요. 흙모래를 털어낼 정도로만요. 아주 깨끗하진 않아도 돼요. 잠깐 담그는데 아주 깨끗해질 순 없었겠죠? 비누를 써서 박박 문지르며 씻을 때도 완전히 깨끗해지진 않아요. 그건 최소한의 상징적 행위죠. 흙먼지를 다른 사람 집에 들이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발을 담근 뒤 거기 놓인 천으로 닦은 다음 함께 들어갔어요.
부처님은 당시의 라훌라를 발 씻는 대야에 비유하셨어요. 대야는 온갖 먼지와 흙, 진흙이 묻어 더럽지요. 바깥의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내니까요. 부처님은 말씀하셨죠. 『만일 네가 발 씻는 대야처럼 더럽다면, 아무도 너를 소중히 여기거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탁자나 의자에 앉히지 않을 것이다. 또 더러운 발을 씻는 것보다 더 고귀한 일에는 쓰이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꾸짖으셨어요. 부처님의 친아들이었는데요. 라훌라를 꾸짖으신 것은 친아들이었기 때문이죠. 그가 친아들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은 꾸짖지 않으셨을 거예요. 다른 이의 자녀였다면 그렇게 꾸짖지 않으셨겠죠. 네, 그게 요점이죠.
예를 들어, 아난다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주술에 걸려 한 여인의 집에 갔을 때도 부처님은 심하게 꾸짖으셨지만, 방에서 따로 꾸짖으셨죠. 개인적인 꾸중이었기에 오늘날처럼 테이프에 녹음하거나 기록한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음성 녹음 같은 건 안 했죠. 하니 부처님이 누구를 꾸짖으셨는지 알 수 없죠. 허나 능엄경 전체는 오직 아난다만을 위해, 아난다를 가르치기 위해 말씀하신 거예요.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그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단점을 피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 거였죠. 늘 이러셨죠. 『아난다야,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아난다야, 저것을 이해해야 한다』 능엄경 전체가 그를 위해, 그를 가르치고자 말씀하신 거예요. 당시에 아난다는 한 여인의 주술에 걸려 유혹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사실 주술이 필요 없죠. 남녀가 만날 때는 주술이 필요 없어요. 누가 누구에게 주술을 걸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주술은 필요치 않아요. 살짝 윙크만 해도 이미 끝난 거예요. 특히 바깥의 그런 여성들은 옷을 잘 입죠. 그게 그들 전문이죠. 주술은 필요 없어요. 무슨 마법을 그렇게 걸겠어요.
아난다는 좀… 너무 방만했다고 할까요. 아니, 조심성이 없었죠. 조심성 없고 허술했어요. 아난다는 계율을 지키는 것에 매우 부주의했어요. 예를 들어, 부처님은 여자나 소녀를 만지지 말라고 가르치셨죠. 이성의 눈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수행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싶다면, 여자의 눈을 절대 똑바로 쳐다보지 말아라.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라. 다가갈 구실을 찾지 말아라』 그런데도 아난다는 다가갈 구실을 찾았던 것 같아요. 물을 청하는 척까지 했죠. 그런데 그 여자는 물만 준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주었죠. 자발적으로요. 그러자 그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해져서 그녀를 따라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께 기도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위해 능엄주를 외우셨어요. 만트라를 외울 필요도 전혀 없었죠. 아난다는 부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는 물이나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더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두지 않고 서둘러 떠났어요. 이미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문득 두려움을 느끼며 부처님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능엄경, 혹은 능엄주는 아난다 때문에 만들어진 거예요.
그는 규율을 잘 따르지 않았어요. 『수행자로서 나는 잘하고 있어.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마음에 두지 않아. 내겐 여자든 남자든 똑같아』 우리가 너무 가까워지거나 너무 부주의해지면 불가피하게 그런 에너지장에 끌려 들어가는 거예요. 혹은 많은 경우, 과거의 업보 때문일 수 있죠. 과거의 업보적 인연은 업으로 인한 오래된 속박이죠. 과거에, 여러분은 부부였을 수도 있고 서로에게 약속을 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과거에 그녀가 당신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당신이 그녀를 떠났거나 했던 거예요. 이제 그녀가 돌아와서 당신을 다시 찾는 거죠. 네, 그런 식이죠.
그래서 부처님들과 천국이 우리에게 계율을 철저히 지키라고 가르치시는 거예요. 안 그러면 나중에 업보가 다시 찾아올 테니까요. 설령 영적 수행을 한다 해도 업보는 우리를 찾아오게 마련이에요. 피할 곳이 없죠. 그렇게 돼요. 이렇게 말할 순 없어요. 『어째서 부처님들과 천국은 이토록 엄격하신가? 아내를 몇 명 두든 그들이 상관하실 일이 아닌데 왜 금하시는 걸까?』 금지하기 위한 게 아니에요. 허나 우리가 부주의하고 문란하게 행동해서 너무 많은 업을 쌓으면 생을 거듭할수록 우린 지쳐버릴 거예요. 이번 생에 아내 다섯 명, 다음 생에 또 다섯 명을 두면 열 명이 되죠. 이해해요? 그럼 여러분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열 명의 여자가 기다릴 거고 정말 엉망이 되겠죠. 그럼 수행을 아예 못하겠죠. 그들이 이미 문밖에 서 있을 거예요. 집 안에 다섯 명이 서 있고 문밖에도 다섯 명이 서 있어서 어딜 가든 그들을 마주치게 될 거예요. 그때는 아무리 울고불고 통곡을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그러니 업장이나 업의 열매를 원치 않는다면, 씨앗을 뿌리지 마세요. 원인을 심지 않으면 결과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돼요. 그게 다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행동하지 마세요. 그러면 나중에 몹시 피곤해질 거예요. 그게 다죠. 만일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부처님은 줄곧 여러분을 걱정할 만큼 한가하지 않으시죠. 친자식도 마찬가지예요. 만일 친자식이라 해도 착하지 않으면 친자식이 아닌 것처럼 대접받을 수 있어요. 때론 착한 의붓 자녀가 친자녀처럼 되기도 하죠.
가령 라훌라는 어렸을 때 노는 것을 좋아했고, 때로는 게으르고 부주의했어요.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늘 라훌라에게 주의를 주며 엄하게 대하셔야 했죠. 한 번은 다른 곳에서 승려가 왔을 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손님이 잘 수 있도록 잠자리를 양보하라고 했어요. 라훌라는 발우를 들고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죠. 마침 그 방의 승려가 방을 비운 상태라서 라훌라는 거기서 잠을 잤어요. 얼마 후, 그 승려가 돌아오자 그 방도 나가야 했고 더는 잘 곳이 없었어요. 라훌라는 발우를 꼭 껴안고 화장실에 가서 잠을 잤어요. 어울락(베트남)에서 『화장실』이라고 부르는 곳 말이에요. 그는 거기 가서 잤어요. 봤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는 건 아니죠. 부처님은 친자식이라고 편애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손님을 친아들보다 더 극진히 대접하셨죠.
그래서 때로는 수행도 전혀 안 하고 여러분의 스승을 한 번밖에 보지 않은 손님들이 왔을 때 이 스승이 이것저것을 대접하고 선물을 주는 걸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들의 손발을 잡아주고 악수도 하고 눈을 마주치기도 해요. 그녀는 그들을 배웅하고 여러분에게도 나가서 배웅해 달라고 부탁하죠. 하지만 여러분은, 세상에, 거기 가서 사나흘은 있어야 한 번 쳐다봐 줄까 말까죠. 게다가 그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해요. 오늘 어떤 나라 언어로 말했다면 내일은 또 다른 언어로 말하죠. 그녀는 여러분이 이런 귀로 듣게 만들어요…
통역이 있긴 하지만, 간혹 이 형제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통역을 해주죠. 통역을 해주긴 하는데 전혀 안 맞죠. 그녀는 아주 길게 말했는데 통역은 그걸 단 두세 문장으로 요약해 버릴 때도 있죠.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면 그는 그냥 이렇게 말하죠. 『그냥 따라 웃으세요. 스승님께서 지금 너무 길게 말씀하셔서 어떻게 통역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웃고 넘어가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박수 치는 것을 보면 이러죠. 『여러분, 빨리 박수 치세요. 뭘 기다리나요?』 그럼 박수 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절반도 못 들어요.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죠. 어쨌든 그녀도 어울락(베트남) 출신인데 수백 가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하죠.
그리고 손님들이 오시면, 그녀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아주 세심하게 보살펴 주죠. 손님들은 다르죠. 그렇죠? 우리는 이미 가족인데, 어떻게 매일 그런 대접을 받겠어요? (맞습니다) 이곳에 온 여러분은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나를 도와 손님들을 맞이해야 해요. 중생을 구원하고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해요. 그들의 고통은 물질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감정적인 고통일 수도 있어요.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통받고, 윤회의 굴레에 갇히게 되죠. 그들은 자신의 불성을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와서 차근차근 수행해야 해요. 막 수행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약간 도와줘야 해요. 우리가 오랫동안 수행을 해서 수행이 깊어지고 안정되면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죠. 가족의 장녀, 혹은 적어도 둘째 언니나 셋째 언니처럼 되는 거죠. 어린아이처럼 부모님이 계속 떠먹여 주길 기대할 순 없잖아요. 그럴 수는 없죠. 하니 어떤 것도 비교하거나 질투하지 마세요. 경전에는 이런 예가 많이 나와 있어요. 스승이 그 부처님들을 따라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지금 이렇게 된 상황에서 여러분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에 이 기회를 빌려 이 점을 분명히 밝히는 거예요. 과거에 부처님도 똑같이 하셨어요. 친아들을 화장실에서 자게 하셨죠. 다른 장소가 없었으니까요.
과거에는 지금처럼 텐트를 가지고 어디든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네) 지금 여러분은 이런 안락한 여건 속에서 수행하고 있어요. 여러분 각자 부처가 되었고 각자 자신만의 사원을 갖고 있어요. 사원은 1.5제곱미터 정도 되죠. 그렇죠? 그리고 그 위에 둥근 게 있어서 마치 무덤처럼 보이죠. 따라서 영적 수행은 내면으로 약간 죽는 것과 같아요. 그렇죠? (네) 수행은 마치 이미 죽은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해요. 텐트 안에 눕는 것과 무덤 속에 눕는 건 차이가 없죠. 하지만 이 『죽음』은 물질계에서 덧없는 명예와 환상을 좇지 않는다는 의미죠. 우리 자신은 여전히 평소처럼 살아가고 있죠.
사실, 우린 전보다 더 영웅적이고, 강인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요. 우린 자신이 뭘 하는지 알고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매 순간 명확히 알아요. 우리가 무엇을 하든 부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선한 의도로 행한다는 것을 알죠. 우리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불국토 안에 있음을 알아요. 우리는 부처님의 공기로 숨을 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은 부처님의 우주 안에 존재하죠. 따라서 날마다 더 고귀해지고 위대해지고 행복해지죠. 고귀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죠. 그들의 이상이 순수하고 평화로우니까요. 그들은 숭고하고 고귀하며 온몸의 모든 세포가 저절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죠. 『일체유심조』니까요.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오죠. 마음이 순수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 몸도 순수해질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순수하면 세상도 순수하다』고 하는 거예요. 불국토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에 있어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불국토이죠. 아니면 무슨 나라겠어요? 유령의 나라인가요? (아뇨) 부처님이 어떻게 유령들이 날뛰며 다른 세상을 만들게 놔두시겠어요? 물론 아니죠.
모든 나라가 불국토이며, 모든 법이 부처님의 법이죠. 우린 영적 수행을 위해, 우리의 불성을 기억하고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런 법을 만들지요. 비교할 게 없다면/대조적인 게 없다면 어떻게 상반된 것을 인식하겠어요? 여성이 없다면 어떻게 남성을 알겠어요? 내가 전에 말했듯이요. 고통이 없다면 행복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요? 가난이 없다면 돈과 부유함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 거예요. 우린 『황금 접시와 옥그릇』을 갖고 태어났죠. 우린 저 위에서 누렸던 행복을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이곳에 내려왔어요. 우리가 다시 돌아갈 때, 우린 자신의 불성을 더욱 깊이 느끼고 이해하게 되죠. 만일 우리가 계속 『나는 불성이다. 나는 부처다. 부처, 부처, 부처…』라고는 하는데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죠. 우린 자신의 불성을 깨닫고자 이 세상에 온 거죠. 사실 그것 외엔 할 일이 없죠.
따라서 누가 불성을 깨달았다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거예요. 이를 『무학보살』이라고 하죠. 『무학』은 교육을 못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깨달음을 얻었기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것은 또한 『불퇴보살』과도 같아요. 자신의 불성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요. 하지만 이왕에 여기 왔으니 재미 삼아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겠죠. 흙을 파고 고구마를 심는 등 말이에요. 흙을 파든 안 파든 마찬가지이지만 이 몸을 지니고 있는 동안 몸도 쓰는 것도 좋겠죠. 우린 이 육신을 입고 있으니 그걸 사용할 수 있어요. 육신을 이용해 좋은 일을 하거나, 우리가 만든 것을 즐길 수도 있죠. (네) 그게 다예요. 좋아요.
이제 집에 가서 잘 자요. (네) 고마워요. 가야 할 사람은 가고 머물 사람은 머무세요. 내가 언제 갈지는 모르겠어요.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걸 하고 갈 거예요. 그게 아니면 이미 갔겠죠. 그 일이 아니면 벌써 갔을 거예요. (네) 서류를 받으러 거기로 가거나 그들이 여기로 보내줄 때까지 기다리면 되죠. 그래서 내가 좀 더 여기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문서 작업이 끝난 상태라면 이미 갔을 거예요. 지난 며칠은 주말이었죠. (주말이었습니다) 네, 주말이었죠. 그리고 무슨 공휴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월요일도 공휴일이었어요. 그래서 총 3, 4일의 연휴가 됐죠. 난 그 기간 내내 여기서 식사하며 지냈어요. 해서 여러분이 아주 행복해했죠. 여러분 모두 내가 여기 갇힌 걸 보고 너무나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왜 다들 그렇게 『친절한』가요? 다들 이렇게 기도했나 봐요. 『일이 잘 안돼서 그녀가 여기 머물게 해주세요』 내 일이 순조롭고 신속하게 진행되길 기도하는 대신에 이렇게 기도하죠. 『그녀 일은 상관 마세요. 느릴수록 더 좋아요!』 이럴 때는 거북주민 같은 행정이 아주 유용하죠. 『천천히 기어가게 해주세요. 그래야 그녀가 여기 오래 계시면서 옛날이야기를 매일 밤 들려주실 거예요』 어차피 여기서는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요. 온종일 먹고 앉아만 있으려니 다리가 아프고 뻣뻣해지죠. 밤에 여기 모여서 이야기할 때가 제일 즐겁잖아요. 그렇죠? (네) 여기선 연극이나 콘서트를 보러 나갈 수도 없으니까요.
자, 이제 모두 가서 쉬세요. 괜찮죠? (네) 가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스승님, 안녕히 주무세요) 고마워요. 다들 충분히 봤죠. 그렇죠? (네) 충분히 봤죠? 새 옷을 보면 계속 쳐다보게 되죠. (너무 아름답습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간단해요. 여러분도 만들 수 있어요. (너무 예뻐요. 너무 예뻐요) 여러분도 만들 수 있어요. 어떤 옷들은 손수 바느질하기 힘들지만 이런 간단한 옷들은 직접 바느질하는 게 더 저렴해요. (네) 한데 색깔을 잘 골라야 해요. 원단도 잘 골라야 하고요. 비슷해 보이는 걸 찾는 게 아니에요.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걸 찾아야 하죠. 여러분의 체형도 고려해야 하고요. 그래야 잘 어울리죠. (네) 약간 통통한 사람들은 이런 스타일은 입지 마세요. 나를 따라 입고선 안 어울린다고 불평하며 날 나무라지 마세요. 그러곤 날 탓하겠죠. 이런 옷을 입으려면 2, 3일은 굶어야 할 거예요. 아니면 하루 두 끼만 먹거나요. 하루에 한두 끼만, 조금만 먹어야 하죠.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죠. 좋아요. 잘 있어요. (네) 잘 자요. 치아가 영원히 아름답기를. 잘 있어요.
사진: 『만물 사랑』











